왜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지난 9월 12일 서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지역복지 희망클럽 교육에 참가했습니다.

첫 주차로 강수돌 선생님의 특강을 들었고 이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같은 길을 가다보면

 

저는 원래 사회복지전공자는 아니고 경영학을 전공했고 인사조직과 노사에서 일했습니다. 척박한 환경과 조건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삶과 구조를 생각하다보니 기업의 역량으로 풀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풀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경제영역까지 넓어졌습니다. 경제영역을 공부하다보니 이것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방식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육문제, 환경, 생태 등의 문제까지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지하수를 깊이 파면 지하수끼리 통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일을 하고 제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지만 깊이 뚫다보면 다 같은 영역에서 만나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방식에서 만나게 됩니다.

 

 

 

 

양날의 칼, 국가복지

 

비스마르크 시절에 국가복지를 구축하는 과정은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막 시작된 독일의 산업화 과정에서 시골에서는 노동자들이 서로 돕고 살았지만 도시에서 공제조합이나 학습모임, 계모임 등 자율복지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국가복지가 생겨나면서 이런 것들이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양날의 칼입니다. 즉 자율복지가 국가복지 이전에 존재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식으로 국교로 선택되기 전에 서양에서는 마을마다 세 가지를 항상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로 촛불 하나, 빵 한 조각, 덮을 수 있는 이불 하나입니다. 누구나 마을에 찾아오면 접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고 체제가 잡히기 시작하면서 마을마다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자는 어느 누구가 방문하더라도 접대할 수 있는 구조, 주민에 의한 자치구조가 있었으나, 후자는 손님이 오면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가복지에 대한 도발적인 에피소드입니다.

 

복지는 국가와 돈이 아니라 우리의 자발성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이런 부분이 가장 소중한 복지시스템입니다.

 

 

 

 

인간성과 자율성이 있는 공동체

 

성서에 빗대면 태초에 마을(공동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공동체가 갈라지면 개인입니다. 개인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공동체적 개인, 관계적 개인, 사회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경쟁이 심해지면서 개인으로 나누는 상황이 더욱 커졌습니다.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행복했나요? 백점과 일등을 기준으로 해서 아이들을 경쟁으로 사로잡지 않아도 아이들이 자기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은 충분히 있습니다. 독일과 영국의 교육시스템, 대안학교, 자율학교, 혁신학교 등은 일제고사로 아이들을 줄 세우지 않아도 아이들이 편안하게 자기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증거입니다.

 

경쟁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경제구조로 말미암아 인간성과 자율성의 따뜻한 공동체가 깨어지는 과정이 우리 역사의 과정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울복지재단처럼 국가복지, 마을복지, 지역복지, 기업복지 등의 역할도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마을, 공동체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루는데 부수적으로 필요한 것을 국가나 기업이 돕는 역할은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기대면 별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정적으로 복지를 접근하지만 우리가 각 지역에서 인간성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살려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국가복지에 기대게 된다면 혜택을 받는 사람은 대상화되거나 구걸하는 존재가 됩니다. 양극화를 막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자생력으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관이 변해야

 

최근에 읽었던 독일 책에 일종의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부모주식회사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에도 낮에 홀로 있는 아이들이 있는 가난한 동네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인간적,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만 18세 이상을 어른으로 하지만 독일은 결과 지향적으로 어른을 정의하지 않고 아이들을 날마다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부모주식회사에서는 이런 부모들이 따뜻하게 아이들을 코치하고 자녀와 대화하는 방법, 공감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기의 한풀이를 아이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와 자녀가 둘 다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각각의 인생을 인정하고 서로 돕는 역할을 하면 살아남습니다. 우리나라는 좋은 대학가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동네에 축하 현수막을 붙입니다. 이런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이제 나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다, 출세할 수 있다, 재벌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풍조를 그대로 둔 채,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현장에서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거시적인 부분, 인생의 가치관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경영(?)이라는 책(아직 출간 되지 않음)에서도 언급했듯이 삶의 뿌리에서 공동체적인 마인드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제민주주의,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등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대상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상에서 주체로,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데에서도 아이를 대상화하면서 양육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할까요? 수단과 대상이 되면 폭력, 알콜, 일 등에 중독되게 됩니다. 1년에 250~300명의 학생이 자살하고, 학교를 못다니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5만~8만 명이나 됩니다. 학교를 잘 다니는 아이들도 정말 행복해서 다니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전 세계에서 꼴찌입니다.

 

학교는 이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배움의 장으로 거듭나야합니다. 팔방미인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하게 잘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따듯한 마음이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함께 꿈꾸면 현실이 됩니다

 

저의 주된 생활지는 조치원입니다. 도시에서보다 삶의 질은 훨씬 높습니다. 마을에서 이장으로 있습니다. 조그마한 마을 도서관에서 글쓰기 교실도 하고 있지만 지금은 마을 앞에 투기성 아파트를 반대하면서 잠시 중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일수록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바닷물의 3.4~4%의 소금이 짠 맛을 내고 있습니다. 힘들 때 꿈꾸지 않으면 가망이 없습니다. 한두명이 꿈을 꾸기 시작하면 언젠가 꽃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드라마 각시탈을 보면 일본 순사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습니다. 이 때 독립운동가의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쉴 새 없이 던지다보면 흔적이 남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바위는 모래로 변한다. 결국 계란에서는 생명의 병아리가 나오고 부서진 바위를 밟고 설 날이 오게 된다. 죽어있는 바위와 살아있는 계란은 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기는 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혼자 꿈꾸면 꿈이지만 함께 꿈꾸면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

 

그래서 지역에서 농업, 협동조합, 대안먹거리, 귀농 등의 활동이 필요합니다. 거제도 쪽에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10명 내외의 작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월급은 25만원 정도, 하지만 너무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서로 도와가며 주인공이 되어가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고백합니다. 자생력이 있는 복지, 지역과 마을에서 이런 것이 왕성하게 올라 올 때 그 사회에 활기가 넘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지국가 스웨덴은 복지부분에 30%의 예산을 지원하고 OECD 평균은 20%, 우리는 7%를 지원한다고 합니다. 복지국가 운동은 우리나라의 복지 예산을 OECD 평균정도로 올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웨덴조차도 수십만 개의 클럽 등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국가에게만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 간의 살아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가치를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강수돌 선생님의 강의는 ‘살림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강의가 더욱 기대되었습니다. 책에서는 국가복지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강의의 주최와 사람들을 살펴 함께 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신 듯합니다.

 

강의의 핵심은 마을과 지역 안에서 스스로 상부상조 할 수 있는 자율복지, 주민들 간의 살아있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경쟁 체제에서 마땅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세우고 이것이 실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역할을 생각해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단순히 국가복지의 힘을 빌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안에서 서로 돕고 관계 할 수 있는 공동체 의식과 문화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거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지역 안에 생동시키는 것이 사회복지사의 역할일 것입니다.

 

촛불 하나, 빵 한 조각, 이불 하나로 지나가는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도록 했었던 그 인정과 나눔이 우리 현장과 지역 안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 조차 수십만 개의 클럽과 모임으로 지역 안에 관계가 살아 있듯이 현재 우리 지역 안에도 이러한 주민간의 관계가 살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사람답게, 사회를 사회답게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강수돌 선생님의 삶이 더욱 궁금합니다. 조치원에서 어떠한 사명과 역할로 살아가고 계신지, 무엇을 꿈꾸고 계신지,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더 듣고 싶습니다. 마을 안에서 어떻게 복지를 풀어내고 계신지, 풀어내야 할지 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권 대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