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만들기 지원사업

 

 

바야흐로 '마을공동체'라는 단어가 유행입니다. 복지현장에서도 마을공동체와 관련된 다양한 공모사업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마을만들기지원센터, 평생학습 마을학교, 서울시 지원사업, 각 구청의 지원사업, 서울시복지재단의 지원사업 등 '마을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지원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라는 가치와 지향이 복지현장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은 환영할 일입니다. 관련해서 예산이 확대되니 좀 더 자유롭고 활발하게 사업을 펼쳐 나갈 수 있으니 좋습니다. 마을공동체에서 강조하는 주민참여, 주민중심, 관계망 확대 등 뜻한 바 일을 펼쳐 나갈 수 있습니다.

 

 

 

 

지원사업의 부작용

 

 

이처럼 좋은 장점과 기회도 있지만 마을공동체와 관련된 여러 지원사업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느끼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여기저기 공모사업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넘쳐나니 사람들도 돈과 프로그램에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기존에 주민모임(도깨비 연방)에서 활동하던 주민도 동네에서 다른 모임과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자연스레 기존 모임의 활동은 줄어들게 됩니다.  

 

서울시나 구에서는 지원사업에 대해 주민 모니터링단을 운영하는데 여기에 참가하면 인건비도 줍니다. 아무에게나 모니터링단을 시킬 수 없으니 당연히 동네에서 열심히 활동 하던 주민들에게 먼저 기회가 돌아갑니다. 

 

돈 받는 일을 하다보니 기존 모임에 소홀해지게 됩니다. 기존 모임에 남아있던 주민은 돈 받으면서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주민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주민과 주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갈등과 불신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옛날에 우리 얼마나 좋았어? 옛날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우리끼리 얼마나 재미있게 활동했는데.."

동네 일 오래 하신 주민의 말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지원사업으로 몇백만원, 몇천만원 지원되는 사업의 지출내역을 살펴보면 인건비의 비중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젊을 때 사회생활도 하고 여러 재능과 취미 활동을 하던 주부들에게 좋은 기회입니다. 경력단절 여성주부들이 마을 일을 하면서도 가정에 부담을 덜 수 있는 있으니 조금 더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마을에서 활동가로 키워 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연초가 되면서 마을공동체와 관련된 공모사업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삼삼오오 모인 주민들이 지원사업을 받기 위해 앞다퉈 계획서를 제출합니다. 지원받고자 하는 모임은 많고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누구는 지원받고 누구는 지원받지 못합니다. 공모사업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동네 다른 주민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합니다. 

 

공모사업에 당선이 되고 인건비를 지급 할 때도 작은 돈이 아닙니다. 보조 강사비부터 3급 강사비까지 최소 5만원에서 10~20만원까지 인건비를 지원합니다. 이렇게까지 많은 돈이 필요할지, 적절할지 생각합니다. 나중에 공모사업이 끊기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받아와야 할지 막막합니다.

 

"서울시에서 내려오는 돈도 다 우리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이렇게 예산을 써도 되는건지 모르겠어."

동네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주민의 말인데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주민모임의 역사와 맥락 속에, 충분히 주민들과 소통하며 함께 책임지고 결정하는 지원사업은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공모사업이 뜨면 일단 쓰고 본다는 자세는 조심스럽습니다.

주민모임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해오다가 필요에 맞게 지원사업을 신청할 수 있겠으나 일단 써놓고 계획서에 맞게 억지로 사업을 끼워맞춰가는 방식도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사회복지사이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기존에 인건비 없이 자기의 재능을 나눠주던 주민들이었는데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 지원사업을 쓰는 것이 옳을까? 동네에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지원사업을 받으면 마을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만약 정권이 바뀌고 마을만들기와 관련된 예산이 모두 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주민들의 인건비 확보를 위해 사회사업가가 일을 하는 것이 옳을까?

 

 

물론 공모사업의 장점과 필요성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모사업을 통해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낸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모사업으로 주민의 관계가 깨어지고 다른 주민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공모사업을 써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공모사업을 잘 따오는 사회복지사, 주민들에게 많은 인건비를 줄 수 있는 사회복지사가 되기보다 주민이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회복지사이고 싶습니다. 

 

공모사업 쓴다고 계획서 쓰고 서류와 예산 챙기는 사회복지사가 되기보다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좋은 주민들 만나고 잇는 사회복지사이고 싶습니다.

 

지원사업으로 8,000원 짜리 맛있는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사회복지사가 되기보다 주민들과 조금씩 도시락 싸와서 나눠먹는 소박한 사회복지사이고 싶습니다.

 

 

 

 

 

 

Posted by 권 대익
자료/행사정보2012. 11. 19. 09:22

 

 

Posted by 권 대익

 

 

함께 웃는 마을 공동체 “즐거운가”

 

엄 미 경

 

 

 

 

나의 어린 시절

 

 

나는 1968년 11월22일(음력) 도봉구 수유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엄마가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가신 후 전라북도 정읍군에 있는 친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그곳은 열두 가정이 사는 집성촌이었다. 초가집에 호롱불에... 마음이 따뜻하고 순박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나는 남들과는 다른 상황이 때론 힘들기도 했지만 정이 많은 아이로 인사 잘하는 아이로 사랑받으며 잘 자랐다.

 

내 나이 열두 살 때 엄마가 서울에서 돈을 벌어 집을 얻으셔서 나를 키우겠다고 데리러 오셨고 새 아줌마랑 헤어진 아버지와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을 하셨다. 5학년 겨울방학에 나는 나와 엄마가 다른 남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나의 지옥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폭행과 폭언을 멈추지 않았고 엄마는 나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은 남의 자식까지 키워야 한다는 억울함에 늘 힘들어 하셨다. 1년에 반은 밖에서 잠을 잔 것 같다. 문이 열린 교회에 가서 숨어 있고 남의 집 옥상에 숨어 있고 .... 남들과는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참 억울하고 분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다니기 시작한 교회의 전도사님이 지극 정성으로 나를 만나주셨다.

나의 가능성을 발견해주셨고 교회에 자주 불러 붕 떠 있는 내 마음을 잡아주셨다. 교회 활동을 통하여 나는 위로를 얻었고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였다. 전도사님은 내가 세례를 받던 날 날 데리고 홀트 아동복지회에 자원봉사를 나가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저렇게 많은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 있다니... 그 날 이후 나는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한 달에 한번 홀트에 자원봉사를 가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고 홀트에 가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서원 기도를 하였다. 내가 잘 성장하여 홀트의 아이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주겠다고.. 그런 목표가 있었기에 비행 청소년이 되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전혀 기억이 없는 두 살 때 집을 나간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은 아버지랑 살 수 없다고 전세금을 빼서 집을 나가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를 피해 월세 집을 얻어 생활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고등학교 때 내가 했던 서원 기도가 생각이 나서 나는 그 길로 홀트 아동복지회에 입사하였다.

 

 

 

홀트 아동복지회를 만나다

 

1990년 5월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동정심만으로 시작했던 나의 홀트 생활... 어설픈 동정심이 얼마나 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 폭력일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300여명의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24시간 시설 생활을 하는 곳.. 그들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배의 소개로 장애우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때 한참 장애인 인권과 이동권을 이야기할 때였다. 다름, 차별과 맞서 열심히 싸웠다. 시설에서 처음으로 생활복지사들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자연인인 너를 사랑해 ~ ~

 

어렵고 힘들 때 마다 힘이 되어 주었던 교회 오빠가 내가 생활하는 홀트에 찾아와 정성껏 우리 아이들을 만나 주었다. 나는 한 번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상상할 수 가 없었기에 사귀자고 제안하는 오빠에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거절을 하였다. 오빠는 참 정성스러웠다. 우리 아이들이 많이 아픈 날 홀트에 왔다가 별이 쏟아지는 홀트에서 “미경아 나는 자연인인 너를 사랑해” 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인 나를 사랑한다고 하였다.

 

누구보다도 나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우리 부모님은 이혼했고 내가 자라온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나는 결혼을 결심하였다. 지금의 남편은 내게는 정말 선한 이웃이다. 결혼을 하면서 24시간 근무체제였던 홀트를 퇴사하게 되었다.

 

 

 

공동육아 우리 어린이집에 입사하다

 

홀트를 나오기 전 공항동에서 화재로 인하여 세 아이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용직 일을 나가시고 엄마는 파출부 나가시면서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가 방 안에서 성냥불 장난을 하던 아이들이 그만.... 나는 그 신문 기사를 보며 정말 많이 울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생각나서...

 

홀트를 나오게 되면 가난한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겨례 신문에 공동육아 교사 모집 공채 공고가 났고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해서 입사 지원서를 냈다. 유아 교육도 전공하지 않은 내가 어린이집 교사가 되었으니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생긴 공동육아 우리 어린이집을 통해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다. 부끄럽기만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자랑스러워졌고 자연친화적이고 생태 감수성이 풍부한 삶이 얼마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귀한 거름이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낮에는 어린이집 아이들을 만나고 밤에는 밤이 새도록 세미나 및 회의를 하였다. 교사 교육도 정말 열심히 받았다. 처음 만들어진 공동육아 어린이집이었기에 책임감도 컸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치열하게 토론하였고 많이 성장하였다. 공동체의 기본을 잘 배울 수 있었다. 남편의 지방 발령으로 큰아이가 임신 8개월 때 나는 공동육아를 퇴사하고 전라남도 광양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마을에서 품앗이 공동육아를 시작하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아 함께 살면 참 좋겠다는 마음으로 큰아이를 낳고 마을에서 품앗이를 시작하였다. 나들이, 요리 만들기, 책 읽어주기, 텃밭 가꾸기.... 함께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돈이 없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품앗이가 참 재미있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 품앗이를 시작하다.

 

송파구 거여동에서 생활하시던 시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셔서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 아프신 시부모님을 모시다가 나는 마을에 책 읽는 엄마 모임에서 품앗이를 제안하였고 “애들아 놀자‘ 품앗이를 시작하였다. 시부모님이 아프실 때 이웃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고마운 이웃들과 재미있게 품앗이를 진행하며 나는 다른 지역의 품앗이 엄마들과도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소통하며 품앗이를 통하여 마을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꿈꾸며 활동하였다. 지역복지포럼 활동을 통하여 우리 마을의 복지에 대한 비전도 함께 나누었다. 둘째를 낳고 품앗이를 하며 우리 마을에 비닐하우스 공부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제 막 돌이 지난 둘째를 업고 일주일에 한두 번 공부방에 가서 급식 자원봉사를 시작하였다.

 

 

 

공부방 교사가 되다

 

아이들이 맛있게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너무 행복했다. 건강한 먹을거리를 통하여 건강하게 몸도 마음도 성장하게 되기를 기도하며 정성껏 먹을거리를 만들었다. 급식 교사가 없어 자원봉사에 의존해 늘 발을 동동 구르던 공부방에서 오후에 급식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비닐하우스 공부방의 급식 교사가 되었다. 오전에는 품앗이 교사 오후에는 공부방 급식 교사 그렇게 지내기를 몇 년... 집에 가도 잠을 잘 때도 자꾸 공부방 친구들이 생각나서 나는 마을에서 진행하던 품앗이 교사를 접고 공부방의 전담 교사가 되었다.

 

건강한 먹을거리만큼 아이들의 성장의 거름이 되어주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정말 많은 강의와 강좌를 들었다. 절박한 마음이 전해졌을까?

 

한국주민정보교육원의 교육 과정을 듣게 되었고 그 과정을 들은 우리 마을 동생이 나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다고 강권하여 나는 주민조직가 과정을 듣게 되었다. 14기 주민 조직가 훈련과정을 통하여 나는 정말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고 당사자의 자주성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태도가 기법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말 교육 과정을 통하여 뼈저리게 느꼈다.

 

그 과정을 통하여 나는 정말 보석 같은 동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인생의 선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 전용 지역아동센터 무지개빛 청개구리 교사가 되다

 

정성껏 잘 나누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선한 지렛대 역할을 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음공부를 하였다. 선한 이웃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삶을 정성껏 껴안기 시작하였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내가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공동체의 시작 즐거운가

 

비닐하우스가 철거되고 우린 갈 곳이 없었다.

“꿈을 꾸면 온 우주가 우리를 지지해준다” 연금술사에 나온 말이 현실이 되기를 꿈꾸며 이사할 공간을 알아보았다. 정말 기적 같은 공간을 우린 마을에 만들게 되었다.

 

공부방을 졸업한 졸업생들과 무지개빛 청개구리 학생들 학부모님들 마을 어르신들 자원봉사 선생님들 모두 다 한마음이 되어 즐거운가를 만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꿈과 염원이 담긴 즐거운가.... 왜 나는 마을 공동체를 꿈꿀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도 선한 이웃들과 더불어 지혜롭게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회복되는 기쁨을 경험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마을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라산이 인정한 14기 주민조직가 방글이의 개인 신조

 

1.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조직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2.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잘 경청하겠다.

3. 나의 동정심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겠다.

4.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나누는 삶을 살겠다.

5. 내가 뭘 원하는지 나를 정성스럽게 바라보기 위하여 마음 다스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

6. 내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겠다.

7.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용기를 가지겠다.

8. 자연 친화적인 삶을 통하여 생명과 사람을 살리는 일에 함께 하겠다.

 

 

Posted by 권 대익